무심시도(無心是道)

모처럼 산사(山寺)에 눈이 깊이 쌓이고 온 산은 고요와 평안으로 가득찬 듯합니다. 이따금 피어오르는 산등성이 암자의 굴뚝연기도 정겹게 느껴지고 오솔길 따라 찍혀 있는 토끼발자욱은 끝없는 동경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만 같습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표표히 흩날리는 눈, 아랫목 따뜻한 토방의 붉은 화로에는 차 주전자가 끓고, 조는 듯 명상하는듯…… 이러한 경지를 일러 일찌기 불교에서는 도의 경지라 하였을까.
한 수행자가 마조스님에게 물었읍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마조스님 아르길,
“무심이 도니라.”
‘무심이 도니라’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이 무심의 골짜기에서 길잃고 헤매었을까, 하지만 나 이제 사제님에게 다시 묻겠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심입니까?”
나는 불교만큼 많은 오해를 받는 가르침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은 거의 모두 곡해되고 굴절되어 이해되고 있읍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불교는 무심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 초연한 은자(隱者)로서의 태도는 불교인의 독특한 성격처럼 되어버렸읍니다. 조는 듯 잠자는 듯한 침묵과 웃을 듯 말듯 달관한 듯한 무관심은 적멸과 열반의 경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읍니다.
사제님도 공부하는 과정에서 웃어른이나 동료들로부터 주위의 시비곡절에 휘말리지 말고 오직 불도에만 오롯이 정진하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대해 귀막고 눈막고 입다물고서 오로지 묵묵히 정진한다 함은 한편으론 참 훌륭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듯이 불교 집안에서는, 수행의 환경과 내용에서 한결같이 무심할 것을 요망하는데, 바로 여기에 수행에서의 중대한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이란 선종(禪宗)에서나 교종(敎宗)에서나 다 같이 깨달음과 도의 경지를 묘사하는 훌륭한 표현여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또는 정반대로 풍부하고도 역동적인 말입니다.
흔히들 무심이란 비어 있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마치 비어있는 컵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듯이 마음을 텅 비워두어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또는 명경지수와 같이 순수하고도 청정하게 가라앉은 마음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읍니다. 실상 ‘묵조선(黙照禪)’이라 하여 참선할 때 어떠한 생각이든 하나하나 버려나가서 철저히 무념무상의 경지를 견지하려는 공부법이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런 공부법은 진작에 눈밝은 스님에 의해 올바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읍니다.
무심은 번뇌나 생각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일도 아니며 점진적으로 익히고 정제하여 고도로 단련한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지칭함도 아닙니다. 고요하다거나 잠잠한 침묵의 상태는 더더구나 아니지요. 차라리,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무심은 비어 있기보다는 오히려 꽉 차 있는 것이며, 머물러 있기보다는 행동하는 것이며, 이것 저것의 중간 지점의 중립 상태가 아닌 특정한 견해나 입장을 표현하는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 하여 고요히 앉아 호흡을 헤아리고 자세를 가다듬어 바위나 나무처럼 지각 활동도 없이 침잠된 상태로 나아가기 일쑤인 수행 풍토에서, 무심이란 적극적인 활동이며 꽉 차 있으면서 특정한 견해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통하게 하려면 우리는 불교를 처음부터 새롭게 이해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모든 일을 멈추고 쉬어서 어떤 일에도 마음쓰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선(禪)의 종장(宗匠)이신 대혜스님 같은 분은 평생을 두고 비판했거니와, 진정한 무심의 수행은 철저히 비판적이고도 치열한 구도심으로 불타올라야 하리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고정되고 폐쇄되고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부터 열려 있고 머무름 없는 태도를 가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열려있고 머무르지 않는다 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특정한 입장을 띠지도 않으며, 어떠한 견해나 가치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면, 그 또한 옛스님들이 경계한, 공(空)에 떨어지는 일로서 삶의 생명을 압살당하고 역사로부터 소외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심의 도’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를테면 살아가는 현장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해 나가지만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고착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갖거나 또는 금강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처럼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행자의 삶에서나 일상인의 삶에서 과연 그러한 모습들이 어떻게 구현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겠습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라면, 지난 편지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방편바라밀을 거쳐서만 진정한 무심의 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행의 면에서도 ‘묵조선’이라고 하는, 모든 지각 활동을 쉬어버린 목석과 같은 죽은 수행보다는 분심, 의심, 신심*1 이라는 활화산 같은 뜨거운 구도심을 토대로 한 방편바라밀로서의 간화선(看話禪, 화두선)이 무엇보다 존중되어야 할터이고, 일상적인 불교인의 삶의 태도도 지금처럼 침묵만을 지키고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이고 비창조적인 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방편바라밀을 구현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무심’의 가문침이 잘못 길들어지기는 비단 불가(佛家)의 수행자뿐만이 아니라 사회 속의 많은 생활인들도 그야말로 무심결에 길들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불교의 수행에서 보이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역사의 메카니즘에 비추어 살펴 볼일이라 생각됩니다.
사제님도 아시다시피, 오늘날 사회는 후기 산업사회라 하여 첨단과학의 시대이며, 정보화 시대이기도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체제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크게 나뉜 가운데 수정과 변형을 이루어가고 있읍니다. 더우기 오늘 이땅의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얼키고 설킴의 부산물로서 분단이라는 왜곡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이 오늘의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삶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얻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관계와 변화를 통찰하는 데에서 가능하리라 봅니다.
존재의 관계와 변화를 이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무엇보다 냉엄하면서도 이성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종교의 교리나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서도 아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올바른 무심의 태도가 요망되는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갖가지 오락과 퇴폐 문화로 사람들의 귀와 눈을 마비시키고 도착되도록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특정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에 영합하는 논조나 조작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상의 조그만 생활에 갇힌 채로 무비판적이고 무심한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제도 언론이나 기성과 보수의 목소리가 이땅을 가득 뒤덮고 있질 않습니까? 실로 곡해된 ‘무심’의 한 모습일 따름입니다.
‘참다운 무심’이란 조그만 나로부터 전체와 결부된 나로, 왜곡된 나로부터 나와 결부된 전체의 삶으로 가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호혜평등한 속에서 자유로운 나와 전체의 삶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열쇠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무심의 가르침이 비단 그릇된 불교 스승의 탓만이 아니고 깊이 혜아려보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의도에 의해 그야말로 무심히 살아가도록 길들어지고 있는 탓이 아닐까하고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 그러나, 사제님,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 불교의 집단이란 또 수행자란 무엇입니까?
가장 끈적끈적한 애정의 울타리인 가정을 넘어서서, 일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이익 집단과 결별하고서,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 세계, 인류로부터도 냉엄하게 한걸음 물러서서 우리 삶의 문제를 살펴보고 검증하자는 것이 우리의 태도가 아니겠읍니까?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따져보자는 것 아닙니까? 거창하게는 이러한 모든 삶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객관적으로 따지고 연구하는 대가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는 대가로서 신도(사회)들의 시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태도야말로 무심의 태도요 중정의 태도이니 이것이 바로 역사적 태도입니다.
무심의 가르침에서 우리 수행자가 불교 수행인이기에 가져야 하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보다도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4상*2을 벗어남과 동시에 수행자라는 교단의 울타리 속에 국집되어 있는 우리의 시각을 떨쳐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수도상(修道相)’을 떨치는 일입니다.

무엇이 도인가? 무심이 도니라.
무엇이 도인가? 유심이 도니라.

이것은 똑같은 이야입업니다.
사제님, 그러면 무심과 유심을 떠나서 어디 한번 일러보십시오.
“무엇이 도입니까? “
“………”
옛사람은 노래했읍니다.

무심을 가지고 도라 이르지 말라.
무심 또한 한 관문에 막혀 있나니.
지금도 밖에는 소리없이 눈이 쌓이고 있는데……

詿
* 1 참선 공부에서 갖추어야 하는 세 가직의 기본 마음 자세. 분심(慣心)은 격발하는 마음을 의심(疑心)은 불교의 명제 곧 화두에 대한 의구심을, 신성(信心)은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가 깨달음으로 이어지리라는 신념을 각각 뜻한다.
* 2 대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형태의 집착(금강경 등에서 말함). 이상(我相)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나’의 영역에 국집되는 것이고, 인상(人相)은 인간이라는 유(類)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며, 중생상(衆生相)은 관계와 변화속에 이루어지는 생명성에 익숙해져 있는 모습 또는 훌륭한 삶과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가지는 태도이며, 수자상(壽者相)은 생명의 실체가 있어 그것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유지된다고 보는 착각을 각각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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