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동선원 정덕스님

단군한배검이 ‘홍익인간’ 의 이념으로이 나라를 처음 연 날이 개천절이듯, 세상의 일을 마감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 간 날을 어천절 (御天節)이라 한다. 음력 삼월 보름, 이날 대종교 신자들은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 예를 갖추고 치성을 드리며 이 날을 기념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대종교 신자들은 참성단에 올라 어천절 기념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망칙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디에 소속하고 있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난데없이 목사와 기독교인 몇 명이 참성단에 올라오더니 제물(祭物)에 침을 뱉으며 대종교 신자들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를 연신 외치는 것이었다.
끝내, 심한 몸싸움까지 벌어졌던 이 사태는 광신자들의 못된 만행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분주하던 평창동의 효동선원 이곳도 사흘 내리 괴한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그저 단순한 도난사건였다면, 이와 같은 맘고생은 아예 없었으리라.
법당의 부처님은 불단 위에 공양 올려진 수박덩이로 머리를 얻어 맞은 채 닷집 밖으로 나동그라져 있었고, 수없이 난자당한 부처님의 가슴팍엔 선뜻 옮기기 어려운 욕설이 담긴 모욕적인 글귀가 씌여 있었다. 초입의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는 대형표지판에 조차 ‘개 온날’ 이라 휘갈겨져 있었으니, 구태여 이 광란의 현장을 발견한 주지 정덕스님은 어떤 표정이 되어 있었는지 묘사할 필요는 없겠다.
아무래도 인근 타종교인들의 소행이라는 등 추측되는 바가 없지 않으나, 경찰쪽에선 신경 조차 쓰고 있질 않다.
“불쌍하고 가엾어요, 그네들이요. 자기 자신도 올바로 찾지 못하면서 남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려는 성직자나 그걸 좋아라 따르는 신도들이나 모두가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도
잘못이 있지요. 성직자로서 그네들을 제도하지 못한 책임 말이에요.“
만중생의 안식처로 스물네 시간 열려 있던 법당에 이젠 안전장치가 설치될 지경이고 보면 정법수호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과제인지 모르겠다. 사찰 간판조차 부서져버린 효동선원에서 비구니 정덕스님은 더욱 신앙의 매무새를 가다듬고서 ‘새출발의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정덕스님은 독실한불교가정의 무남독녀로 자랐다. 특히 개화사장을 지닌 어머니의 돈독한불심이 스님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도 스님들은 화장실에도 안가는 줄로 알 만큼 높고 거룩한 어른이라 여기며 ‘난 저-밑의 중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길 가다가 스님을 만나면 맨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함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런 신심을어려서부터 지니게 되었다.
“참선에 열심이던 어머니도 내가 서너살 때부터 스님이 되길 원하셨어요.”
스님이 되어 실참하고 깨달음 얻길 바라셨지요. 막상출가를 결심하니까 어머니로서의 정이 사무쳐 오는지 눈물까지 보이셨지만요.“
아무튼 은연중에 자신이 스님되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을 알게 된 어린시절의 스님은 어머니께 떼쓰다가 히든카드로 내미는 것은 ‘나 그럼, 스님 안해 !’ 라며 무작정 버티는 일이었고, 그럴 땐 모친은 꼼짝없이 요구사항을 받아줬다고 한다. 장난기가 많을 나이에도 친척들이 “왈가닥이라서 어디 시집보내겠냐?”며 농을 하면 “난 절에 갈건데 뭐”라고 서슴없이 대답하곤 했다.
집에는 많은 스님들이 다녀가시곤 했는데, 오신 스님들께 어머니는 ‘쟤가 후일 입산할 터이니 좋은 법문 들려달라’며 부탁을 드리곤 했었다.
물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저 불교를 좋아했을 따름이지 구체적으로 불교에 심취하기엔 이른 나이였다. 그런 어린 시절의 스님에게 정작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 건 열살나던 해, 누더기 광목옷을 입고서 탁발나온 스님이 들려준 말씀이었다. 그 스님으로부터 미륵 용화화상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나도 스님이 되어, 나중에 용화세계에서 임금노릇 해야지’하는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광수의 ‘원효대사’나 ‘꿈’ 등을 탐독하며,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되고서 이년 여 동안을 참선 공부에만 힘썼다. 절에 들어오던 날 ‘만에 하나 이 생활이 맞지 않으면 딱 십년만 살아야지. 하지만, 승려로 일생을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인개 참선 열심히 해서 깨달은 자 되야지’ 하며 다짐했던 스님은 막상 적응을 해서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불교내부에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숱하게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문지가 귀하던 시절, 신도들이 손바닥 크기 만큼 잘라 향 두가닥을 포장해온 신문지를 펼쳐 읽게되는 조각난 기사는 산중에서 유일하게 접한 정보매체였다 우주를 향해 로케트가 발사되는 기사를 읽은 스님은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가 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아직도 케케묵은 봉건성을 벗어나지 못한 불교가 이십일세기를 앞둔 현대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될 지를 고민하면서 스님은 예전에 겪어 보지 못한 큰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강사스님을 따라 경주에 있는 불교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마들이 합장하고, 염불하는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같은 세상에 저런 형식을 통해서 저 아이들이 불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 하는 물음표를 던지고 돌아 나오며 스님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래, 현대와 전통은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되돌아오는 길에 정덕스님은 불교현대화에 앞장설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스님은 이리랑 노랫가락마냥 누구나 어디서든 법문보다 쉽게 접할 수 있고 즐겨 부를 수 있는 음악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불교음악을 대중화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음악포교를 하겠다니까 큰스님네들은 하라는 공부는 않는다고 꾸중도 하셨다. 그러나 어쩌랴, 끈질긴 간청에 못 이기는 척하며 큰스님은 음악포교를 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평창동 산꼭대기, 해발로 따지자면 칠백팔십 미터에 위치한 일선사의 주지가 되면서 신문에 ‘음악 좋아하는 청년 불자 모두 모여자’ 라는 광고를 냈다. 이렇게 모여든 이들이 일백여 명.
조계사 불교회관 강당을 빌어 연습을 했다. 그리고 이젠 이들의 거의가 일선 사찰의 합창단 지휘자로, 어린이법회 지도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재정적인 어려움은 컸으나 뒷전에서 인원을 규합하고 공간을 마련해 주는 등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하는 일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실은 이 일 말고 또 다른 꿈이 정덕스님에겐 있었다. 음대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그로부터 훌륭한 인재를 육성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음악의 성숙을 위해선 과감한 투자로 숨은 인재를 발굴함이 최우선이므로 지금은 문 닫은 대우합창단 같은 프로합창단을 불교계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좋은 곡을 만드는 이들 좋은 곡을 부르는 이들이 점차 늘어갈 때 이 나라의 불교는 융성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정덕스님은 종립학교라는 동국대학에 불교음악대학이 없는 게 못내 서운하다.
그래서 전통 불교음악을 계승하기 위해 만든 것이 곧 ‘한국 전통불교 옥천범음회’이다. 없어질 것을 염려해 계승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따름이지 범패에 관하여 아는 건 하나도 없다는 정덕스님이다.
범패의 일인자인 송암스님 등의 대가들을 초빙해 오년째 범패강습을 해왔다 기초반과 연수반 외에도 전수반이 있어 알짜배기 전수생을 양성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학생과 주부로부터 교수와 스님들에 이르기까지 전통음악에 관심을 지닌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음악에 뜻을 둔 이들이 왜 음대가 아닌,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을까를 생각하면 스님은 답답한 마음이 된다.
“난 스님이예요. 스님은 스님공부를 해야죠. 음악에 앞서 포교공부가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덕스님이 오랫동안 꿈꿔온 일은 불교음악대학을 건립하는 것이다. 전통 범패를 계승, 발전시키는 곳, 현대 불교음악의 산실로서의 불교음대 말이다. 일년에 수십명씩 불교음악 전공자들이 배출된다면 앞으로 한국의 불교음악이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는 가슴 설레는 일이 현실로 다가올 것임을 확신한다.

효동선원은 백삼십오번 버스종점에서 대궐 같은 호화주택 사이로 난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오른 곳에 있다. 억척스레 포교활동을 한 끝에 팔십사년에 이곳 평창동의 언덕배기터에 자리잡은 건평이 백팔십 평되는 삼 층 건물이다.
요즈음온 청년법회만을 진행하고 있는데 머잖아 시민선방을 개원할 계획이다. 공기 맑은 평창동의 선원은 교통이 약간 불편한 것 말고는 꽤 호응을 받을 듯하다.
부처님귀를 닮아 참으로 크고 긴 귀를 갖고 있는 스님은 언뜻 뵙기엔 곱상하고 여려보이는 인상이지만 불교음악의 발전을 위해 법랍 삼십여 년을 살아온 스님이고 보면 여간 곧은 심지를 지니신게 아닌 것 같다.
이제 좀 쉬어가면서 효동선원을 또
어떻게 일굴끼를 고민하려 했는데 정덕스님은 다시 바쁘게 됐다. 평창동 일대를 성역화하기 위해 광분하는 교인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친 몸을 일으켜 전화기앞에 앉는다.
나날이 삭막해지고 무서워지는 세상은 스님이 더욱 많은 일을 하도록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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