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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진 장에서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이 혼재하고 있다. 용사(龍蛇)의 구별이 아니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릴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것 같다. 토인비식의 이야기라면 내적 프로레타리아트가 창조적 프로레타리아트로 변신되기를 기대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에게 적과 동지쯤은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북극 탐험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북극점에서 50㎞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하루 20㎞의 속도로 항진하면 3일 후에는 극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계기상에는 오히려 5㎞정도 물러나 있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원인은 빙하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자신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빙하의 후퇴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라는 느낌이다. 어쩌면 빙하의 흐름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대화라는 물결에 떠밀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착할 땅도 찾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떠밀려가고 있는 것 같다. 호랑이 등에 매달려 있으면서 뛰어내릴 수도 타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우리는 지금 열려진 장(장)속에서 살고 있다. 열려진 장 그것이 투쟁의 장이라면 우리의 전투력은 얼마나 될까 과거의 막강한 힘과 화려한 전과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법이 지배하지 않으며 오직 투쟁 경고의 밀법만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다. 실제로 불교는 싸움에 서툴다. 피아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도 애매하고, 투쟁을 위한 물리적 힘도 행사할 줄 모른다. 자랑이라면 자랑이지만 약점이라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법력, 즉 법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힘도 외부의 적을 굴복시키는데 사용되기보다는 내부의 적-자신의 적이든지 아니면 집안의 적이든지-을 없애는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신앙 체계나 도가, 유가의 도전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결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으며, 다만 종론(종론)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열려진 장에서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이 혼재하고 있다. 용사(용사)의 구별이 아니라 내 편과 네편을 가릴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것 같다. 내부의 모순이나 갈등을 외적인 힘-이데올로기적인 논리든지 정부의 권력이든지-에 의존하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고 오히려 판 자체를 깨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행위의 근거가 안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정화라는 집안의 싸움이 남긴 결과는 인재와 재산의 낭비였으며, 또한 교육과 사회사업 등 대사회적인 활동의 장을 잃어버린 것뿐이었다. 결국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들 등에 없는 권력의 지배 수단에 놀아났을 뿐이며, 그로부터 득을 얻은 것은 유신론적 종교로서 기독교였다. 이제 우리의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할 때이다. 불교는 유신론적 사고와 유물론인적인 사고를 각각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지탱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부터 무신론이라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이나 도전에 대하여 대응은 커녕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셈이다. 아직도 한편으로는 봉건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셈이다. 아직도 한편으로는 봉건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해서 비판이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교두보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유신론이나 유물론은 그다지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적이 못된다. 오히려 문제는 불교가 사회로부터 잊혀져 가는, 있으나 마나한 종교가 되어 가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인비식의 이야기라면 내적 프로레타리아트가 창조적 프로레타리아트로 변신되기를 기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에게 적과 동지쯤은 구별할 줄 하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