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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大源寺’는 지리산 천왕봉 동쪽에 위치한 고 찰로 신라 진흥왕 9년 (548), 당시 화엄사에 주석하던 ‘연기 조사緣起祖師’가 작은 암자를 지어‘평원사平原 寺’로 불렀다고 한다. 1685년 숙종 때 수풀이 우거진 옛터를 정리하고, 절을 세운 뒤‘대원암大源庵’이라 불렀으며 이곳은 강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 후 고종 27년(1890) ‘구봉혜흔九峰慧昕’선사가 다시 불 사를 하여‘대원사大源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과 참선 수행을 하는 선 방을갖춰‘선禪’과‘교敎’를동시에닦는도량으로거 듭나게 되었다. 창건 이후 세 번의 화재가 있었고, 여 순사건 때 또 한 번의 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다. 현 재의 모습은 1959년‘법일法一’스님의 불사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 대원사에 들어가려면 국립공원 초소를 통과하게 되 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도로를 따라 흐르는 개울의 유 속은 더욱 빨라진다. 너럭바위와 둥글고 큰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을 정도여서 지리산이 깊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해인사를 들어가며 만나게 되는‘홍류동 계곡’과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이다. 절 주 변에서 쉽게 눈에 띄는 상가들의 요란함도 이곳엔 없 다. 피서객들이 모두 물러간 계절이라 산중은 더욱 고 요하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산사는 추적 한 공기로 가득하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봉상루’아 래 서니 대웅전이 정면에 들어온다. 왼쪽으론 원통전 과 천광전, 명부전이 나란히 들어섰다.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오는 사찰은 매우 단정한 모습을 보여준 다. 대웅전에 들러 삼배를 하고, 선원을 향해 발을 옮 긴다. 선객들이 모두 떠난 선방, 마당엔 붉을 빛을 잃 어가는 백일홍 나무가 팔을 벌리고 섰다. ‘화무십일홍 이라 했던가?’비바람에 떨어진 꽃은 흙이 되어가고 있다.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날의 붉은 파도 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선객처럼 왔다가 그이들처 럼 사라진 것일까? 선방과 마주하고 있는‘다층석탑 多層石塔’은 많은 이들을 말없이 맞이하고 무심히 보 냈을 것이다. 탑처럼 무심할 수 없는 세월은 배롱나무 에 꽃을 피우고 다시 떨군다. 탑은 9층으로 추정되는 데, 신라 선덕여왕 15년인 646년‘자장 율사慈藏律師’ 22_23 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석탑 앞‘배례 석’에는 1784년 정조 8년에 다시 탑을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탑에선 봉안된 58과의부처님사리가발견되었다. 탑신 의 네 모서리는 공양 상들이 받치고 있 다. 지나가던 스님이 농담을 던진다. “불 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세웠으니, 불 심 깊은 어느 석수장이가 조정의 대신들 에게 불법을 받들라는 뜻에서 저기 세워 놓고벌을주는거예요! 하하하!” 원통전과 천광전 사이 길을 걸어‘산 왕각’을향한다. ‘산왕각’엔 여자의 모습을 한 산신이 모셔져 있다. ‘대원사大源寺’스님들은 이곳에 올 땐 우스갯소리로“왕언니 만 나러 간다”고 한단다. ‘산왕각’에 앉아 낙수소리를 듣는다. 비구니 참선도량에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가 복잡한 마음과 잡다한 생각들을 모두 쓸어내 버리려는 듯 내린다. 소로우의 말이 빗줄기를 타 고내린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 들에게스스로무게를갖게하라. 열린 눈을 가질 때, 우리의 시야가 자 유로워질 때,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 러낸다. 필요하다면 신조차도 홀로 내버려 두 라. 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를 만나러 가 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를 홀로 남겨두 고돌아설때이다. 영혼이 썩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서는 수행을 계속하는 일 외에 내가 배 운것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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